(깊이 고민하며) 어... 몰라 그러니까, 어떻게 들어온 건진 모르겠어. 그냥 어느샌가 이곳에 들어왔다는 걸 알게 됐을 뿐이야. 아직까지 나갈 생각은 없어. 나갈 때가 되면 나가겠지만... 그게 중요한가? 언제부터라고 묻자면 한... 7년 정도 된 것 같아. 하지만 어쩌면 7년 전부터 이 만남은 예견되어 있을지도 몰라. 어때, 그렇게 생각하니까 낭만적이지? 헤헤
예견이라니 무슨 소리야 그게...
7년이면 꽤 오래 살았는데? 이곳의 노란 물고기가 안 그래 보여도 사실 좀 예민하다는 거 알지? 텃새...라고 할까나? 북적북적한 어항 분위기를 싫어해. 너도 알잖아! 그래도 7년이면 노란물고기도 그렇고... 이곳 물고기들이 널 꽤나 마음에 들어 했나 보다!
누가 내 얘기 하나?
진짜 수많은 돌들이 있어... 정말 수많은 돌들이 있고, 물고기들도 있고. 너무나 복잡하고 각자 자기 방식대로 굴러가는 돌들이 많아서 어쩌면 난 정신없는 그곳에서 도망쳐 온 걸지도 몰라. 여기는 진 씨네 어항에 비교하자면 굉장히 잘 정돈되어 있어. 하지만 이건 내가 아직 이곳에 대해 잘 몰라서 하는 얘기일 수도 있지. 이곳에 나보다 오래 살고 있던 물고기 말을 들어볼 필요가 있을 거 같아. 진 씨네 어항도 이곳만큼이나 충분히 멋있는 곳이야! 어항마다 각자의 매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전에도 말했지만 난 진 씨네 어항 한 번 놀러가 보고 싶다니까.
이야기만 들어도 정신없어! 난 절대 못 가!
진씨네 어항 가장 깊은 곳엔 초롱 아귀가 살고 있어. 아, 사실은 있는 거라는 얘기만 들었지 초롱 아귀가 정말로 살아 있는지 어디에 살고 있는지는 몰라. 근데 저기 아래 불빛이 깜빡거리는 게 아마도 초롱 아귀가 있어서이지 않을까 조약돌들은 생각하고 있어. 아마 저 깊은 곳에 있는 초롱 아귀는 할 줄 아는 거 하고는 불 비추는 것밖에 없어서 다른 물고기들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모든 걸 차단한 채로 불만 깜빡이면서 누군가 자기 자신을 찾아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걸 거야. 안타깝게도 조약돌인 나로서는 어항 위로만 도망칠 수 있지 아래로 내려갈 순 없어. 누군가 초롱 아귀를 찾아주고 초롱 아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난 그렇게 생각해.
지현의 어항에도 반짝거리는 뭔가가 있기는 있는데... 조약돌 넌 못 봤을 수도 있겠다. 진짜 가끔 모든 물고기들이 자고 있을 때 반짝거리거든.
나도 이야기만 들었는데, 그 반짝거리는 거 말야. 지현의 물고기들이 정말 깊이, 깊숙히, 어항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잠들어 버릴 때 등장한다던데. 들어 보니 진 씨네 초롱 아귀랑 비슷한 것 같아. 모든 어항에 반짝이는 초롱 아귀가 한 마리씩은 있는 걸까? 그게 초롱 아귀인지도 모르겠지만...
진 씨네 어항의 물고기들은 다들 자기 고집이 세서 사실 진 씨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물고기는 다른 어항으로부터 온 물고기들이야. 자기 고집이 센 진 씨 어항의 물고기들도 새로운 물고기가 온다는 이야기만 들으면 다들 서로 먼저 맞이하려고 앞다퉈 싸운다니까? 아, 맞다!! 생각해 보니까 진 씨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순간은 깜깜한 밤에 물고기들이 밝게 빛나는 초롱 아귀를 보면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인 것 같기도 해. 초롱 아귀가 정말 있는지는 모르지만, 진 씨네 어항 가족들은 밤마다 아귀라고 생각하는 것의 반짝이는 불빛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눠.
이곳에 사는 물고기들은 새로운 물고기들이 온다고 하면 경계부터 하는데, 그곳은 정말 차원이 다른 어항이구나. 오히려 지현은 전날과 비교했을 때 물고기들 그리고 어항의 상태가 그대로일 때 안정감을 느끼는 것 같아. 그렇지 않아?
그건 나 때문일 거야. 난 조용하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좋단 말이야. 너넨 안 그래?
근데 있잖아. 초롱 아귀가 진짜 맞는지 아닌지 확인해 보려는 물고기들은 없었던 거야? 그게 정말 어디서 나오는 불빛인지 나만 궁금해?
어… 나는 사실 돌이라 그런가? 건망증이 심해서 한 순간을 뽑자니 기억이 잘 나질 않네… 나에게 있어서 가장 찬란한 순간을 뽑자면 진 씨네 어항에서 나오는 순간이었던 것 같아. 내가 어항에서 나오는 그 순간에서야 진 씨네 어항을 한눈에 다 볼 수 있었는데, 그때 내가 그곳에 살면서 몰랐던 모습을 보게 됐거든. 내가 떠나는 이곳이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멋있는 곳임을 알았어. 아직도 그 순간이 잊혀지지 않아.
어땠는데? 조금 더 자세히 말해 줘.
나도 가끔 답답해서 점프할 때 이곳을 한눈에 보는데, 조약돌의 말이 맞아. 답답함에 못이겨 짜증이 나고 화가 나도 한 번 점프해 어항을 바라보면 이곳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얼마나 넓고, 영롱하고... 그 모습을 떠올리다 보면 답답한 마음이 사그라든다니까. 진 씨네 어항도 비슷한 모습일까?
다시 돌아가고 싶은 거야?
내가 수많은 조약돌 중에 그저 그런 하나일 것 같다는 걱정이 들 때가 가장 괴로웠어. 왜냐하면 진 씨 어항에 사는 모든 물고기, 그리고 조약돌들은 자기가 가장 특별하다고 믿으면서 살아가고 있거든. 물고기들이 나를 찾아주지 않을 때나 내가 이끼가 묻어서 더러워질 때마다 나는 스스로 특별하지 않은 존재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나는 그럴 때마다 이 어항을 떠나는 상상을 했고... 그러다 보니 지금 여기에 있네, 하하.
네 말이 맞아... 나도 내색하진 않지만 정말 이 어항을 떠나 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많아. 조약돌 네가 들어오기 한참 전에는 이곳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네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도 커서 어항물이 아주 탁해진 적이 한 번 있었어. 너희도 기억나?
어, 기억나. 너도 그렇지만 다른 물고기들도 그땐 정말 많이 힘들어했어. 그때 이곳에 다른 물고기는 한 마리도 들어올 수 없었고, 지현의 눈물 때문인지 어항물이 거의 홍수마냥 자꾸 흘러넘쳤었잖아. 그래도 요새는 그런 생각 잘 안 하는 것 같아.
내가 계속 바쁘게 헤엄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야. 바쁘게 움직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을 안 하게 되는 것 같지 않니?
약간의 트라우마야. 아까 난 내 몸에 이끼가 끼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고 말했잖아? 이끼가 끼었다는 사실은 날 특별하지 않게 만드는 것 같거든. 나는 특별해지고 싶어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지금도 이렇게 굴러가고 있어. 그리고 이렇게 쉴 틈 없이 굴러가다보면 언젠간 지현의 어항 속에 있는 물고기들도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물고기를 발견할지 몰라, 내가.
이끼 낀 돌도 나름의 매력이 있는데. 내가 물고기가 아니라 돌로 태어났다면, 나는 정말 한 발자국도 움직이고 있지 않았을 거야.
넌 충분히 특별해! 진 씨네 어항에서는 어땠을지 몰라도 특히 이곳에서 네 존재는 그 누구보다 특별하지. 네가 이곳에 온 이후로 여긴 정말 많이 달라졌거든! 나는 네 움직임이 이곳에 새로운 물고기들을 불러모을 거라고 믿는 물고기들 중 하나야.
맞아. 조약돌 네가 오기 전에 이곳은 변화라는 것 하나 없이 조용하고 고요했는데... 네가 온 뒤로는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생겨. 물고기들도 조금씩 활력을 되찾는 기분이야.
여기서 평생을 산 넌 모를 거야. 내가 진 씨네 어항에서 나왔을 때 진 씨네 어항 전체를 본 것처럼 지현의 어항에 들어갈 때 이곳의 모습을 한눈에 보았어. 이곳은 매우 넓고 너희가 발견하지 못한 곳이 훨씬 많아. 다채롭고, 아름답고... 나는 이곳에서 느릿느릿 굴러가고 있지만, 너희는 나보다 훨씬 더 빠르니까 나보다 빨리 어항의 새로운 모습들을 발견하고 그곳을 헤엄칠 수 있을 거야.
이곳에 계속 살고 싶을 만큼 아름다워?
사실 지현의 어항에 처음 왔을 때 내가 원래 살던 곳과 매우 달라서 적응할 수 있을까 굉장히 고민했어. 하지만 놀라운 내 적응 능력 때문일까, 아니면 지현이 어항의 넓은 포용력 덕분일까? 나는 이렇게 이곳에서 계속해서 너와 이야기도 나누고 살아가고 있어.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뽑아 보자면, 지현이 가장 아끼는 초록 물고기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아.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초록 물고기는 내가 도망쳐온 그곳에 한 번 가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어.
초록 물고기?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있어, 초록 물고기.
나도 본 적 없어. 그런 물고기도 우리랑 같이 살고 있었어?
산호초에 쉬면서 각자 할 일만 하지 말고, 가만히 어항 속을 관찰하고 들여다 봐. 초록 물고기는 소심해서 잘 안 나타나. 조약돌처럼 먼저 관심을 가져주고 이야기를 들어 주려고 해야 모습을 드러낸단 말이야.
더클래식의 여우야
뭔가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향수인 것 같아. 향수를 불러일으켜. 내가 도망쳐 왔음에도 뭔가 원인 모를, 의미 모를... 향수를 음악으로 표현하자면 그 노래가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사실 어항은 물속이고, 언제나 비가 내린다고 볼 수 있는데...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비가 오는 이곳에서도 비가 내리는 그 때의 몽글몽글한 마음을 떠올리게 돼. 이곳에서 잘 지내다가도 가끔 나도 모르게 슬퍼지는 때가 있어.
슬픔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